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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이야기

워커힐의 유래와 낙동강전투 해리스워커

by 역사와 여행 2021.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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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튼 해리스 워커장군은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을 성공적으로 사수해 인천 상륙작전의 발판을 마련한 인물로써 당시 초대 유엔 지상군총사령관 겸 초대 주한 미 8군 사령관이었습니다. 워커 대장은 6.25 전쟁 발발 직후 파죽지세로 남진하던 북한군을 낙동강 방어선에서 막아내면서 부하들에게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한국을 끝까지 지키겠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전쟁평론가들은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가 낙동강전투에서 밀렸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만큼 낙동강 전선은 한국을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낸 생명선이었습니다.

전쟁 발발 1개월 반 만인 8월 초, 북한군은 목포 진주 김천 포항을 함락시켰고 당시 북한 국가주석 김일성은 "8월이 오기 전에 끝내라" "8월은 승리의 달이다" 라고 전투지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에 유엔군은 8월 4일, 진주∼김천∼함창∼안동∼영덕을 잇는 240km(남북 160km, 동서 80km)에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북한군은 13개 사단의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지만 워커장군은 이 방어선을 끝까지 사수했습니다. 당시 낙동강 방어선은 미8군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따 ‘워커 라인’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낙동강방어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은 3일 만에 함락되었고, 남한의 군사력이 형편없는 상황에서 UN군이 참전했지만 전투력의 열세는 여전했습니다.

전쟁발발 35일 만에 한국은 낙동강전선까지 후퇴하였고 이곳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남한의 마지막 방어선이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8.15 광복절 행사를 대구에서 치르기로 계획하고 있었고 대한민국의 운명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풍전등화와 같았던 위기상황에서 당시 상주를 지키던 미 제25사단장은 설상가상으로 철수명령을 내리고 맙니다. 반면 워커장군은 “죽음으로 전선을 지키라” “이곳은 마지막 보루이다“ “더 이상 철수도 없고 후퇴도 없다“ “부산까지 후퇴한다면 우리 모두가 죽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한국을 끝가지 지키겠다“ 라는 사명감으로 목숨 건 배수진을 쳤습니다.

2개월여 동안 대한민국의 사활을 건 낙동강방어선 전투는 한국전쟁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 할 만큼 치열했던 전투였고, 낙동강전선이 뚫리면 미군은 바로 철수한다는 계획이 극비리에 진행되었던 절체절명의 전투에서 워커대장은 낙동강방어선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발판을 만들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월튼 해리스 워커대장은 1889년 12월 3일, 텍사스주 벨턴에서 태어나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5보병사단 기관총대대 중대장으로 참전했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며 독일군에 공포의 대상이었던 스미스 패튼장군의 휘하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공훈을 세우고 종전 후 제5군 사령관을 거쳐 주일 제8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6.25전쟁 발발 당시 미국정부의 관계자들은 극동아시아에서 한국은 필요하지 않고 일본만 보호하면 된다고 입을 모았는데 하지만 워커대장만이 미국과 UN은 한국을 지켜야 한다고 피력하였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명령으로 미8군 사령관으로 7월 13일 한반도에 파견되었는데 미국의 한 저명한 종군기자는 “미 8군사령관 워커 대장은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을 사수하고 북한군을 저지, 격퇴한 UN 지상군사령관으로서 대한민국을 구해 낸 은인이다.” 라고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워커대장은 치열한 전투에서 항상 그의 병사와 함께 했는데 그는 “전투는 저지 아니면 죽음”이라면서 “어떠한 후퇴철수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에게 퇴각할 수 있는 전선은 남아있지 않다. 반격을 개시해야 한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만일 우리의 병사들 중에서 누군가 목숨을 잃는다면 우리는 모두 같이 싸우다가 함께 죽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 전선을 끝까지 고수할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인식해주기 바란다 라며 병사들에게 군인의 사명감을 북돋았습니다.

월튼 해리스 워커대장

아버지로부터 투철한 군인정신과 국가관, 사명감을 이어받은 아들 워커 대위 역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었는데 당시 미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아들에게 “군인의 가장 큰 영광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아들에게 한국전쟁참여를 종용하였고 아들 역시 군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자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샘 워커대위는 한국군이 중공군의 대규모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전장에서 큰 승리의 공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워커대장은 국군 27여단에 대한 부대표창을 이승만대통령을 대신하여 수여하는 한편, 후퇴작전 중 큰 전공을 인정받아 미국정부가 샘 워커대위에게 수여하는 은성무공훈장을 직접 가슴에 달아 주고자 지프차로 달려가던 중 이국만리 먼 나라 한국에서 1950년 12월 23일 한국군 병사가 운전하던 트럭과 충돌해 안타깝게 사망하고 맙니다.

월튼 워커의 죽음 이후, 그의 아들 샘 워커는 미군 역사상 최연소 대장으로 진급하게 되면서 미 육군 역사상 유일하게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대장에 진급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또한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워커 장군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서울 아차산에 워커힐(Walker Hill)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국가를 먼저 생각하고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워커대장의 정신은 광장동의 ‘워커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