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이란 이름의 뜻은 베이징의 옛 이름 ‘베이핑(北平)’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뜻인데, 중국에서 ‘베이징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할아버지의 재력과 아버지의 명예를 모두 갖췄다는 ‘슈퍼 금수저’를 말합니다.
시 주석의 아버지 시중쉰은 13세 때부터 중국 혁명에 뛰어들어 마오쩌둥의 대장정이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도록 최후의 근거지를 제공했던 인물로 중국 근현대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정치 명문가의 자제로 꽃길만 걸을 줄 알았던 시진핑은 그의 아버지가 1962년 ‘류즈단 사건’을 겪으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았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던 시진핑의 삶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게 됐고 비판대에 오른 아버지를 직접 공격해야 할 처지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1970년 대, 문화대혁명이 중국 대륙을 휘감으면서 부자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는데 시진핑은 홍위병들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15살 때부터 7년간 ‘하방(下放)’을 택했습니다. 하방이란 지식인들의 사상개조를 위해 그들을 농촌으로 보낸다는 뜻이지만 어린 시진핑의 생활은 강제 노역자와 다름없었습니다.
또한 10번이나 입당지원서를 냈지만 번번이 공산당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도 어린 시진핑에게는 큰 시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진핑은 “나는 황토의 아들”이라고 할 정도로 하방 생활이 자신을 키웠다고 말하곤 하는데 중국 최고 권력자로 자리 잡은 뒤, 어릴 때 살았던 토굴을 직접 방문 하기도했습니다.

시진핑은 량자허현 서기의 추천으로 마침내 1974년 공산당에 입당하게 되고 이후 어렵사리 중국 최고 명문대학인 칭화대학에 입학했는데 시진핑은 한 회고문에서 ‘붙여주면 들어가고 아니면 그만두지’라는 생각으로 1~3지망을 모두 칭화대로 썼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1978년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아버지 시중쉰도 정치적으로 복권이 됐는데 16년 만에 시진핑의 앞날에 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지방근무를 자청한 시진핑은 푸젠성, 허베이성 등 중국 전역을 돌았다고 하는데 그는 지방 경험을 통해 중앙 무대에서 정치엘리트 계파들과 대항할 수 있는 측근들을 만드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인기가 높은 퍼스트레이디이자 ‘정치적 동반자’ 펑리위안과의 만남도 이때 이뤄졌습니다.

중앙 정계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르던 시진핑에게 기회가 찾아온 건 2007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상하이방의 황태자로 불리던 천량위가 비리로 상하이 서기직에서 낙마하자 그가 후임으로 발탁된 것이었습니다.
중국 경제도시 상하이를 책임지는 자리에 오른 그는 그 기회를 살려 단박에 스타 정치인으로 올라섰고 이후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임명되며 권력의 중심으로 도약했습니다. 비록 중앙무대로 복귀하긴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시진핑이 ‘시황제’의 자리에 오르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시진핑이 속한 태자당 세력은 전 국가주석인 장쩌민이 이끄는 상하이방과 당시 국가주석인 후진타오가 이끄는 공청단에 비해 상대적인 파워가 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하이방과 공청단이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암투 속에서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는데 두 세력에 속하지 않으면서 적이 없었던 시진핑을 국가주석 후계자로 삼기로 공청단과 상하이방의 합의가 이뤄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2008년 부주석에 오르며 차기 국가 주석 자리를 예약한 것이었습니다.

사람 좋은 줄만 알았던 시진핑은 권력의 중앙에 들어서자 이빨을 드러냈는데 수면 위로 드러난 계기는 중국은 물론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보시라이 사건’이었습니다.
보시라이 당시 충칭시 서기는 시진핑과 같은 계파인 태자당 내에서 최대 정적이었는데 그는 조직범죄를 소탕하는 등 극좌적 행태로 빈부격차에 불만을 가진 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2011년 말, 보시라이 아내의 사주로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가 독살당한 일이 발생하고 이듬해 사건에 연루돼 신변의 위협을 느낀 보시라이의 최측근 왕리쥔이 미국 영사관으로 도망가는 일이 발생하자 시진핑은 후진타오 당시 국가주석과 손잡고
이를 구실로 보시라이를 해임하고 사법처리를 주도했습니다.
보시라이는 시진핑이 국가주석이 된 해인 2013년 진행된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완전히 몰락해버리고 만 것이었습니다.

또 중국 권력의 정점에 있는 상무위원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을 깨고 보시라이의 정치적 후원자인 저우융캉 정치국 상무위원도 낙마시켰습니다. ‘부패 호랑이’라고 불렸던 저우융캉의 죄목도 아이러니하게 뇌물수수, 직권남용, 국가기밀 고의누설이었습니다.
이어 쑨정차이, 링지화 등 자신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 고위 관료들도 차례로 같은 방법으로 날려버리고 맙니다.
2기 임기가 시작된 2017년부터는 장기집권을 향한 길을 닦기 시작했는데 정치 엘리트인 상하이방과 공청단을 견제하면서 친위대인 시자쥔(習家軍)을 주요직에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장기집권을 위한 마지막 작업으로 시진핑은 ‘덩샤오핑의 유산’이라고 불리는 집단지도체제를 중국 최대 정치이벤트 양회(兩會)에서 깨뜨렸는데 1982년 이후 중국 사회의 근간이 됐던 권력독점과 독재자의 출현을 막기 위해 덩샤오핑이 만든 헌법에서 ‘국가 주석은 2번 이상 연임할 수 없다’는 문구를 삭제하면서 그의 3연임을 막을 수 있는 근거를 없애버립니다.
덩샤오핑 등 역대 중국 지도자들은 1인 독재는 반드시 국가적 재앙으로 끝난다는 교훈을 얻었고 개인이 아닌 시스템이 지배하는 권력 구조를 만들었는데 ‘3연임 제한’ 규정 삭제가 지난 40년 개혁개방의 성과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역사적 퇴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혁명의 희생자였던 시진핑이 그 때 당시로 국가 시스템을 후퇴시킨 셈인데 집단지도체제는 권력을 나누며 정치적 책임도 나누어 가졌는데, 이제는 시진핑 홀로 실패의 책임을 짊어져야 하고 그나마 문화혁명 때는 최고 지도자의 판단 오류에 따른 파장이나 비극이 중국 내부로 한정되었지만 반면 현재 중국은 ‘중국몽’ ‘대국굴기’ ‘군사굴기’ 등을 내세우며 제국주의적 행태를 노골화하고 있어 시진핑이 정책적 오류나 판단 잘못을 저지를 경우 전 세계가 그 후폭풍에 휩싸일 수도 있으며 동시에 중국 내부를 보더라도 빈부격차, 환경오염, 소수민족의 저항, 공산당 독재의 비효율성, 한계에 이른 양적성장, 다른 정치 계파의 반발 등 지뢰밭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시진핑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다지고 있고 ‘시황제’에 도전하는 세력도 보이지 않지만 시진핑의 ‘중국몽’ 구상에 미국 등 서방의 반발이 커지고 중국 내부의 모순이 격화된 가운데 다른 정치세력의 반격이 시작될 경우 그 파장은 예측조차 힘든데 자정 기능이나 견제 능력을 잃은 1인 독재란 항상 파국으로 끝나기 마련이기 때문에 전 세계가 시진핑의 장기 집권 프로젝트를 불안하게 지켜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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