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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이야기

[미국역사] 대륙횡단철도 미국대륙을 통합하다

by 역사와 여행 2021.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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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년, 당시 미국 연방 재무장관 앨버트 갤러틴이 국가교통망을 구상할 때엔 그의 머릿속에 철도라는 개념이 없었는데 그러나 1825년 영국에서 스톡턴-달링턴 구간에 철도가 개통해 증기기관차가 레일 위를 달리자 미국은 5년 후에야 철도를 놓을 수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최신이라는 상품이나 시설이 만들어지면 곧바로 미국에서 도입되곤 했는데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일본이 자신들의 기술을 카피캣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렸지만 산업혁명 초기 당시 미국 또한 영국의 신제품과 신기술을 그대로 가져다 베껴 쓰다시피 하곤 했습니다.

미국 기술자들은 1800년대 초에 들어서야 철도와 증기기관차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했는데 처음으로 증기기관차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인물은 바로 올리버 에번스(Oliver Evans)였습니다. 영국에서 철도가 개설된 다음해인 1826년 매사추세츠주 퀸시에서 3.2km 철도가 개설되어 화강암을 항구까지 실어 나르는데 활용되었는데 이 열차는 딱 한번 운행한 뒤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철로가 무거운 열차를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1828년에는 볼티모어 앤드 오하이오 철도가 놓였으나 처음엔 말이 열차를 끌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1830년 5월 드디어 톰 섬(Tom Thumb)이라는 기관차를 이용해 승객을 실어 나르는 정기운행을 시작됐고 그 해 12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앤드 햄버그에서도 증기기관차가 10km 구간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초창기 미국 기술자들은 주로 영국의 기술을 베껴 철도를 개설하였는데 당시 미국에 걸선된 철도들은 영국제에 비해 힘이나 무게에서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많은 구간에서 영국산을 수입해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톰 섬(Tom Thumb)

 

또한 그 구간마저 매우 짧았는데 찰스턴 앤드 햄버그 철도는 당시로선 가장 긴 철도였음에도 약 218km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한 미국의 철도는 1930년대 중반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5대호의 동쪽인 이리 호까지 진입하면서 본격적인 철도건설이 시작된 지 10년이 지나 5,322km나 연장되었습니다.

초기 레일은 나무 위에 바퀴가 닿는 부분만 쇠로 덧씌운 형태였는데, 무거운 기관차가 올라가면 부서지기 십상이었습니다. 최초로 전체를 쇠로 만든 레일이 나온 것은 1831년 로버트 스티븐스에 의해서였는데 레일을 깔 때에도 화강암 위에 고정시키거나 노반을 덧대어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처럼 자갈 위에 침목을 놓고 레일을 깔아 고정시키는 방식은 남북전쟁 이후에야 등장했는데 이런 초보적인 철도조차도 점점 가볍고 강력한 기관차가 개발되는 동시에 레일 설치와 바퀴 기술이 진화하면서 철도는 강력한 운송수단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철도는 빨랐고, 많은 화물을 실어 날랐기 때문에 선박과 마차에 비해 우세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는데 예컨대 1817년 신시내티에서 뉴욕시까지 바지선과 마차를 이용해 상품을 운송하는데 평균 50일 정도가 걸렸다면 1850년대 이 구간에 철도가 뚫리면서 운송 시간은 약 일주일로 획기적으로 줄었습니다. 화물운송비용 또한 마차로 운송할 때는 톤-마일당 0.17달러였지만 철도 초기엔 0.06달러로 떨어졌고, 남북전쟁 발발 시점엔 0.01 달러로 하락하기도 했습니다. 승객 운임도 그와 함께 떨어졌는데 1820년대 필라델피아에서 마차와 증기선을 갈아타며 퀘벡까지 갈 때 당시 47달러가 들었지만 1860년대에 해당 노선을 기차로 가면서 19달러에 주파할 수 있었습니다. 이 구간의 여행시간 또한 100시간에서 31시간으로 획기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초기 증기기관차

1860년대엔 철도회사들이 수백 개로 늘어나면서 미국 내에 약 4만9천km의 철도가 깔렸고,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를 보유한 나라로 급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철도가 건설되면서 애팔래치아 서부, 미시시피강 유역의 산물이 동부로 이동했고, 미국 서부지역이 빠르게 개척되었습니다. 미시시피 강 유역의 농장에서 생산된 버터와 당근, 사과와 같은 식품 뉴욕에서 싼 값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1861년, 대륙횡단철도 건설은 남북전쟁 중에 시작되었는데 테오도르 유다라는 젊은 토목기사는 캘리포니아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험준한 봉우리를 탐사하고 열차가 지나갈 경로를 수년간 연구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설계도를 그에게 들이밀었는데 링컨은 전쟁이 끝나면 미국을 통합할 수단이 대륙횡단철도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유다의 제안을 받아들여 1862년 철도법에 서명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국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에리브러햄 링컹 대통령

미국은 당시 캘리포니아를 손에 넣었지만 동과 서를 연결하는 교통망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에 두 회사가 도전에 나섰는데 유다가 설립한 센트럴퍼시픽과 동부에서 출발할 유니언퍼시픽이었습니다. 센트럴퍼시픽은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출발 서쪽으로 철도 공사를 하고, 유니언퍼시픽은 동에서 서로 공사를 해서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 것으로 연방정부와 계약을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완성된 구간에 대해서는 정부 보조금이 주어졌는데 난이도에 따라 차등을 두었습니다. 평탄한 선로는 마일 당 약 2만 달러 경사진 땅은 마일 당 약 3만 달러 산맥을 통과하는 땅은 마일 당 약 5만 달러였습니다. 게다가 선로를 1마일 공사할 때마다 철도주변의 일부 땅을 주는 조건이 더해졌는데 해당지역에 철도가 건설되면 인근 땅은 요즘말로 소위 역세권이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도시가 들어서고 공장과 상가가 세워지자 당연히 땅값이 올라간 것인데 이런 수지맞은 장사를 투기자본이 놓칠 리 없었고 탐욕스런 자본이 결합하면서 동과 서의 사업자들은 본격적으로 철로공사에 들어갔고 초기에 혼선은 있었지만, 서부 센트럴은 릴런드 스탠포드가 사실상 경영권을 쥐고 공사를 밀어붙였고, 동부 유니언은 남북전쟁의 영웅 그렌빌 닷지장군을 총감독으로 임명해 전투를 치르듯 공사를 민첩하게 움직여 나갔습니다.

험난하고 비인간적이며, 투기적인 공사는 1869년 5월 10일 드디어 막을 내렸는데 동과 서에서 시작한 공사는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북쪽 프로몬토리 서밋에서 대장정의 막을 내렸습니다. 새크라멘토에서 개업식을 한지 6년만인데 그 동안 서부의 센트럴퍼시픽이 새크라멘토에서 1,110km 동부의 유니언퍼시픽은 오마하에서 1,747km를 연결하면서 공사는 동부 유니언퍼시픽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지긋지긋하던 남과 북의 전쟁도 끝났고, 이제 미국은 동과 서를 통합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유타주에서 마무리된 대륙횡단철도

1880년대 말 미국은 전 구간의 철도 시스템을 물리적으로 통합해 표준궤도를 채택했는데 미국의 철도가 기여한 또 하나는 표준시간을 정했다는 사실입니다. 초기에 내륙 이동과 화물 수송이 철도로 이뤄지면서 미국 지역 간 시간의 불일치에 따른 혼선이 빈번하게 빚어졌습니다. 미국은 1880년대 초 이전까지 지방마다 태양의 위치를 근거로 정오를 정의해 썼는데 시카고와 피츠버그 사이에 30분의 시간차가 발생하는 등 각 지역이 자기 시간대로 기차시간표를 정해 사용하면서 각 역마다 주요도시의 시계가 여러 개 걸리는 기현상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단선 철도의 경우, 시간대의 혼선에 따른 사고도 빈발하자 1880년대 초 미국의 철도관리자들이 천문학자들을 동원해 미국 전역의 시간대를 4개의 표준시간으로 나눠야 한다는데 동의하고 1883년 11월 18일 뉴욕시간 기준으로 정오에 네 개의 시간대가 일제히 시계를 맞추었습니다. 미국의 시간대 조정은 바로 철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철도는 하와이와 알래스카를 제외한 본토 48개주를 모두 연결했는데 텍사스 목장의 소가 열차로 시카고 도살장으로 옮겨졌고 숲에서 난 목재가 철도에 의해 목재를 구하지 못하는 사막지대로 이동해 주택건설에 사용되었습니다. 중부 유전지대는 철도라는 운송수단이 있었기 때문에 개발이 가능했고, 거의 모든 우편물은 철도로 운반되었습니다. 철도는 1914년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이전에 미국 동부와 서부를 연결해 하나의 미국을 건설하는 원동력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