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 강 근방 연변에서 소금팔이를 하던 황소(黃巢)라는 자가 일으킨 민중 봉기로써 쓰러져가던 당나라에 쐐기를 박은 사건입니다.
820년 산둥성에서 태어난 황소는 관리로써의 뜻을 품었으나 지속해서 과거에 낙방을 하자 이에 낙담하고 당시 나라가 독점하던 소금장사의 어둠의 세계로(밀매)로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혼란의 끝을 달리고 있었는데 부패한 환관들이 조정을 농락하고 자기들의 입맛에 따라 황제를 폐위하는 등 갖가지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나라가 여전히 숨 쉴 수 있었던 건 소금 전매라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었기 때문인데요. 예나 지금이나 소금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소금은 필수품으로써 그 당시 소금을 특정지역에서만 얻을 수 있어 그 중요성이 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중국을 방문한 서양 사람들은 중국의 소금 값이 엄청나게 비싼 것에 대해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중국의 소금 산지는 일정지역에 편중되어 이를 독점만 할 수 있다면 엄청난 부를 보장받는 것이었습니다. 소금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는데 당나라도 안사의 난 이후 부족한 재정을 이 소금을 전매함으로써 보충하고 있었습니다.
당나라의 소금 전매정책으로 인해 전매 이전에는 한 말에 10전 하던 소금 값이 110전으로 오르더니, 급기야 300전에 달했고 합니다. 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피해로 전가되었고 살 길이 막막해진 농민들은 관청을 습격하거나 부유층의 집을 불태우는 등 과격 양상을 띠게 됩니다. 이러한 행동은 산발적으로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는데, 이를 규합하여 전국적인 봉기로 이끌어내는데 황소와 같이 소금을 밀매하던 조직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당나라는 이러한 소금밀매조직의 집단행동에 대해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이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하는데 소금 밀매조직들은 적극적인 자위책을 찾아 무장봉기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875년 황소는 같은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왕선지와 봉기를 결심하고 봉기에 나서는데 당나라에 염증을 느끼던 농민들이 이에 가세를 하였고 그 수가 수만에 이르렀다 합니다. 또한 북방의 돌궐, 위구르 출신의 전투 집단을 고용하였는데 이 소금밀매조직의 자금력과 북방의 전투 집단이 결합하니 그 위세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일정 거점을 두지 않는 게릴라 작전을 구사하였는데, 군사이동이 신출귀몰하여 토벌에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881년 1월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는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는 광경이 벌어졌는데 장안 서문으로는 당나라 황제 희종의 피난행렬이 이어지고 동문으로는 반란군이 황금마차를 이끌고 입성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반란군의 장안 입성 을 열렬히 환영했다고 합니다. 장안에 입성한 반란군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자신들의금품을 나눠주며 환심을 샀는데, 이들 또한 가난한 농민 출신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황소는 스스로 천명을 받아 백성의 평등한 삶을 실행하는 천보평균대장(天補平均大將軍)이라 자칭하였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그런 황소군을 보면서 당나라의 폭정으로부터 구원해 줄 구세주로 여겼다고 합니다. 장안에 입성한 황소는 제(齊)나라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황제에 오른 황소 역시 백성들 위에 군림하게 되는데, 애초에 정치에는 문외한이라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게 됩니다. 특히, 황소는 과거에 낙방하였던 자격지심으로 당나라 관리들을 학살하여 민심이 멀어지기 시작한다.
이 때 희대의 통수꾼 주온이 등장하는데, 황소군의 간부였던 주온은 당나라군으로 배신을 때리고 세력을 정비한 당나라군은 수도 장안을 재탈환하게 된다. 황소는 남은 전력을 이끌고 호랑곡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이지만 참패를 하고 말자 스스로 자결하여 일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때가 884년으로 10년간 중국 전체를 들끓게 했던 황소의 난이 마무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당 왕조는 주온의 이러한 공을 인정하여 주요요직을 내리고 전충이라는 새 이름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전충이 907년 당나라 마지막 황제 애제로부터 황제 자리를 선양받아 당나라의 명줄을 끝장내고 5대 10국 시대를 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