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역사] 최초의 공산국가 소련역사와 붕괴 그리고 러시아
1991년 12월 8일 세계사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될 일이 발생하였는데요. 그것은 바로 1917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등장한 최초의 공산국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것이었습니다. 옐친의 러시아를 주축으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3국은 '독립국가 공동체'의 창립을 선언하고 맙니다.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을 역임한 고르바초프는 "3개국만의 합의로 소련의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다"며 반대하였는데요. 나머지 8개 공화국들이 속속 '공동체'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고르바초프로는 대세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40여 년간 미국에 냉전으로 맞선 소련의 붕괴원인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여전히 분분한데요. 그러나 돌이켜 보면 소련의 해체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은 강력한 중앙통제 경제를 실시하며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후 소련은 GNP 규모에서 미국에 버금가는 산업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요.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1985년 권력을 잡았을 때 소련은 20년 이상 경제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성장의 주축이었던 값싼 원료, 풍부한 노동력, 계획에 의한 집중 투자기회는 1970년대 중반 바닥을 드러냈고 대외정책은 오직 군사력에 의존하여 서구권 국가들과의 군비경쟁으로 인해 경제적 부담은 더욱 늘어갔습니다. 미국과 동등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소련 경제위기를 초래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는데요. 평균 GDP 20%에 육박하는 국방비 지출은 소련경제를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뜨렸습니다. 스탈린시대로부터 소련의 경제체제는 중공업에 국가의 재원을 대거 할당하는 등 중공업 우선정책을 펼쳤는데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과의 군비경쟁 탓에 중공업을 우선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중공업 위주의 경제는 1970년대부터 둔화현상을 보였고, 붕괴직전인 1991년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경제성장은 정체됐지만 국민들은 그간의 지속적인 성장과 사회 안정은 그들의 기대 수준을 크게 부풀리고 말았는데요. 정부는 소비재 생산을 늘리는 등 경제성장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나, 구조적인 문제를 결국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소련경제의 위기는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피부로 느낄 정도가 되고만 것입니다. 그럼에도 타성에 젖은 관료들은 이 위기를 실감하지 못했고 오히려 위기를 은폐하고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과적으로 지하경제가 형성되면서 밀수입된 상품들이 지하에서 고가로 거래되기 시작하였고 설상가상으로 '노멘클라투라'라는 특권계급이 형성되어 계급이 사라졌다는 공산사회에 새로운 계급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지위와 특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여 부패한 관료주의의 표본을 보여주었는데요. 이로 인해 전문직 종사자를 비롯한 중산층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서방국가와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서기장에 오른 고르바초프는 경제제도의 민주화 그리고 시장 개방이라는 경제개혁의 방향을 제시했는데요. 하지만 개혁과 개방은 새로운 위기를 초래했고 자유화의 바람을 타고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발생하고 맙니다. 또한 그루지야를 포함한 발트 연안 3개 공화국에서 탈 연방 독립운동이 거세지고 말았는데요. 페레스트로이카의 효과가 느껴지기 이전에 지배체제 이완을 틈타 소수민족들의 독립욕구가 분출되고 만 것입니다.
소련은 본래 인구의 약 절반이 러시아인이고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시인을 합친 슬라브계가 약 70%인 다민족국가인데요. 연방구성 15개 공화국은 원칙적으로 민족단위의 공화국이며 그들 안에도 20개의 민족 단위 자치공화국이 있었습니다. 이 많은 민족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념과 소련 인민으로서의 평등성이었습니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시행으로 그동안 잠복해왔던 민족문제가 폭발적 양상을 띠면서 표출되고 만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1991년 8월 공산당 내 보수파들이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되돌리려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는데요. 고르바초프는 분리주의 세력이 커지면서 소련을 덜 중앙 집중적인 국가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국방, 외교정책만 연방에 맡기고 개별 주권국들의 연합으로 바꾼다는 내용의 ‘신연방조약’을 서명할 예정이었는데요. 부통령 야나예프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세력은 이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으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그러나그들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대도시를 중심으로 특히 모스크바에서 쿠데타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고 만 것입니다. 오히려 당시 옐친 대통령은 쿠데타 세력을 비판하고 이에 동조하지 말라며 연설하면서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쿠데타 주동자들은 옐친을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옐친은 전차 위에 올라타 쿠데타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고만 것입니다.
쿠데타 세력은 백악관 앞으로 특수부대를 보냈으나 대원들은 바리게이트를 뚫고 건물 장악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게 이르렀고 쿠데타를 일으킨 지 3일만 인 8월 21일, 주동자들이 당국에 전원 체포되면서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쿠데타 사건 뒤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발트 해 3국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굴러갑니다. 이어 세력이 약해진 고르바초프는 사임하고 쿠데타를 진압한 옐친은 소련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고 소련 최고회의를 통해 소련 해체를 공식 선언하면서 붉은색에 낫과 망치가 그려진 소련 국기는 크렘린궁에서 내려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