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프랑스역사] 프랑스 대혁명, 근대 민주주의 탄생!

역사와 여행 2019. 5. 5. 21:40
반응형

인간이 모여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인간사회에는 언제나 계급이 존재하였다. 과거 봉건시대에는 몇 안 되는 지배 계급이 대다수를 지배하는 구조였으며 지방 영주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던 봉건주의 제도는 ‘백년 전쟁’을 겪으면서 서서히 왕의 권력이 커지기 시작했고 1600년대 루이 14세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왕의 세력이 강해지니 그 주변으로 왕을 모시는 귀족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왕을 중심으로 한 귀족세력 또한 그 권세가 왕 못지않게 강력해기지 시작했다. 루이 14세 이후 프랑스는 귀족과 성직자 두 계급이 권세를 나눠 가졌었는데 모든 부귀영화를 독차지한 귀족들은 그 생활이 날로 사치스러워졌으며, 그들의 사치스런 생활을 뒷받침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다. 백성들의 삶을 더욱 궁핍해지고 귀족과 평민의 차이는 더욱 벌어졌고 귀족들의 착취로 인해 고통을 겪은 백성들은 귀족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치솟았다.

 

이때 백성과 귀족간의 갈등을 이용해 세력을 넓히려는 또 다른 계급이 출현하는데 당시 나라의 주인은 왕이고 왕의 권리는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신성불가침 영역이었다. 하지만 왕 혼자서 나라를 다스릴 수 없기에 실무를 볼 대신이나 장관이 필요했고 이런 중요한 자리에는 고귀한 혈통 바로 귀족들의 독차지였던 것이다. 귀족과 더불어 권세를 누린 다른 계급으로 하느님을 모시는 성직자들이였다. 그들은 성직자의 본분과 다르게 나랏일에도 깊이 관여하면서 그 권세를 누렸다.

이들 성직자와 귀족 외에 또 하나의 계급 즉 제 3의 계급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성직자나 귀족처럼 높은 신분을 타고나지는 않는 평민 출신들이였다. 하지만 스스로 일반 평민들과 다르게 우월한 존재라고 여기는 존재들이였는데, 그들은 주로 성직자나 귀족들 밑에서 그들이 하는 일을 도와주던 자들로써 주로 귀족들의 돈거래를 맡아보는 은행가 법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법률가 등이었다. 또한 의학지식이 많았던 의사, 그리고 장사로 많은 돈을 번 이들은 제3계급이라 불렸다. 이들의 특징은 의사나 법률가처럼 전문인이 되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해야 했으며, 장사를 통해 많은 부를 쌓아 귀족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평민 계급이자 평민들에게는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으로써 존경을 받는 존재들이였다.

옛 어느 도시건 한 가운데는 지배자의 저택이 있고 영주의 저택을 중심으로 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을 막는 한편 농부나 대장장이 같은 비천한 평민들은 성 밖에서 살았다. 이 계급은 성 안에 모여 비슷한 사람끼리 살아서 성 안 사람이라는 뜻으로 프랑스어로 성이라는 ‘부르(bourg)’와 사람이 결합되어 부르주아라 불렸다.

하지만 그들조차 평민 신분으로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출세의 길은 한계가 있었다. 옛날에는 왕이나 귀족처럼 고귀한 혈통은 하늘이 정해주는 운명이라 믿었지만, 사람들의 지식이 많아지고 생각이 깨이자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귀족들은 우연히 귀족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평민들은 우연히 평민집안에 태어난 이유로 귀족들에게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만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루소의 주장은 그들에게 불을 지피기 충분했다. 이 같은 루소의 주장은 국민들의 의식을 눈뜨게 한 ‘계몽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던 미국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런 평등의 물결은 평민들에게 스스로 정치에 참여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게 되고 이런 부르주아들은 자기들만 권세를 누리려던 귀족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1780년 경 프랑스 인구구조를 살펴보면 총 인구가 대략 2,500만 명 수준 이였는데 제 1계급인 성직자와 제 2계급인 귀족은 전체 인구의 약 1%정도인 27만 명이었다. 이들은 나라의 중요요직을 모두 차지하고 전국의 40%의 국토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특별한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세금조차 안 내고 있어 평민들의 불만이 팽배하였다. 민심이 극도로 흉흉한 판에 미국에서는 영국의 통치를 벗어나고자 독립전쟁이 발발했는데 영국과 원수지간 이였던 프랑스는 영국을 물 맥이기 위해 미국에 군사원조를 시작한다.

 

미국이 독립하는데 까지는 좋았는데 막대한 전비지출로나라살림은 엉망이 된 것이다. 뒤늦게 루이 16세는 이를 수습하려 했지만 계속되는 흉년으로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당시 재무장관 네케르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평민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기로 하고 민심을 걱정한 왕에게 평민 대표를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하자고 건의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귀족들은 이를 반대하였고 평민 역시 상의 없는 세금 인상을 거부하게 된다.

이에 네케르는 1789년 5월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부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이는 프랑스의 3계급인 성직자, 귀족 그리고 부르주아의 회의를 통칭하는 것이었다. 예부터 왕은 나라의 다양한 의견을 듣기 위해 종종 이 삼부회를 개최하곤 하였는데, 실상 부르주아 계급은 구색 맞추기로 입도 뻥긋할 수도 없는 처지가 다반사였다. 1614년부터는 아예 개최도 되지 않다가 175년 만에 재정위기로 개최가 되었는데 이때는 부르주아들이 실력이나 지식 등 어느 면에서도 부족함 없는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부르주아들은 귀족들과 별도로 회의장에서 격리되는 수모를 겪게 되는데, 이에 크게 분노한 부르주아들은 ‘국민의회’ 라 일컫는 회의를 자체적으로 개최하게 된다. 이에 위협을 느낀 루이 16세는 회의장을 강탈하고 회의를 강제 해산하게 되는데, 의원들은 근처에 테니스 코트에 다시 모여 역사적인 테니스 코트의 선언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지속된 경제 불황과 국민들의 뜻을 무시하는 귀족들로 궁 안이 가득차자 국민들의 불만은 하늘 끝까지 치솟았고 이런 국민들을 대표하던 부르주아들은 국민들을 선동하여 무기 창고를 습격, 소총과 대포를 약탈하고 무장하게 되는데, 1789년 드디어 시민들의 분노가 터지고 프랑스 대혁명의 불길이 불타오른 것이었다.

시민들은 초록색 밤나무 잎으로 서로를 표시하고바스티유 요새로 진격하게 되는데, 바스티유 요새는 파리 한복판에 자리 잡은 군사 요새로 무기와 탄약이 가득하였었다. 당시 바스티유 사령관이였던 드 로네이는 시민들을 공격하는데 주저하게 되었고 흥분한 시민들은 전투 의욕을 상실한 수비대를 무찌르고 바스티유를 점령한다.

1789년 7월 14일은 오늘날 프랑스에서 가장 큰 국경일로 여기는 ‘혁명 기념일’로써 파리 시민이 바스티유를 점령했다는 것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지배자의 손에서 스스로 깨닫고 단결하여 나라의 주권을 도로 빼앗은 첫 본보기이자 첫 승리로써 인류 역사상 민주주의로 향하는 위대한 사건으로 불리게 된다.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대대적인 귀족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는데 파리 한복판에서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포함하여 외국으로 피신하지 못한 귀족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표면적으로는 프랑스 대혁명은 마치 국민들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실제 이익을 취한 것은 국민이 아닌 부르주아 계급 이였던 것이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출세의가장 큰 적이었던 귀족과 성직자 계급을 몰아내는데 귀족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선동함으로써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고 일거에 지배계급을 몰아내어 자신들이 그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국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을 폄하할 수 없는 위대한 사건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