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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 오다 노부나가의 등장 일본 전국시대 진정한 일본의 주인은? (Feat.도요토미, 도쿠가와)

역사와 여행 2019. 5. 3.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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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다이묘들이 동군과 서군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 오닌의 난 이후, 다른 국가에서는 국왕이나 다름없던 쇼군의 권위가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일본은 권위보다는 실력이 지배하는 센고쿠(戦国)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중앙정부의 지배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운 이들은 ‘센고쿠다이묘’라해 농민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다른 한편 그들을 자신의 가신으로 삼아  독립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되면서 철저히 무력을 기반으로 하는 통치를 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에 각 센고쿠다이묘들은 자신들의 영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매우 보수적이고 현상유지에 급급한 평화제일주의의 성향을 띄게 되는데, 이러한 센고구다이묘들 사이에서 일본통일을 꿈꾸는 자들이 나타나는데 통일의 기반을 닦은 오다 노부나가, 임진왜란으로 유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불같은 성격의 오다, 지략에 뛰어난 도요토미 그리고 대기만성형 도쿠가와는 그들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손 안의 울지 않는 새를 울리는 방법으로 다혈질의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새는 쓸모없으므로 즉시 죽여 버리고, 두뇌가 뛰어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든 꾀를 내어 새를 울게 만들고, 느긋한 성격을 가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가 울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다고 한다.

전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오다 노부나가는 풍운아의 삶을 살았는데, 역사에서는 만약이라는 단어가 통용되지 않지만 만약 그가 죽지 않고 본인이 거의 이루었던 일본 전국통일을 마무리했다면 조선뿐만 아니라 명나라 등 동아시아의 역사가 크게 뒤바뀌었을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사물에 대한 남다른 안목과 뛰어난 전술로 유명하였는데, 적장의 목을 벤 장수보다 적군의 정확한 정보를 가져온 장수에게 더 큰 상을 주었으며 1543년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전해진 조총의 중요성을 꿰뚫어 보고 훈련에 매진하였다. 당시 조총은 한번 쏘고 다시 재 장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군대를 3개의 조로 3열 배치하여 한 개조가 발사하는 동안 나머지 두 개 조는 장전을 하여 이를 연속해서 교대 사격함으로 전쟁의 양상을 뒤바꾼다.

 

 

또한 당시에는 생소한 병농분리를 통해 전력을 극대화 하게 되는데, 병농분리란 병사와 농민을 분리하는 것으로 오다는 직업군인 체재를 확립한 것이다. 당시 일반 병사들은 대부분 농민출신으로 전쟁이 나면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전투가 끝나거나 추수철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는 게 오랜 관행이었다, 하지만 오다는 직업군인 체재를 확립해 평소에도 군사훈련에 매진할 수 있었으며, 형세가 불리할 때는 성 안에서 웅크리다 농번기가 되어 적군 일부가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때를 틈타 기습공격을 하여 일본의 유력한 다이묘들을 차례차례 굴복시키게 된다.

 

1582년 서쪽의 모리 가문 정도를 남겨두고 전국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는 오다는 모리 가문을 공격하기 위해 수도 교토를 떠나 혼노지라는 절에 머물게 되는데, 오다의 주력부대가 출정한 틈을 그의 심복이였던 아케치 미쓰히데가 혼노지 절을 급습하게 되고 수적으로 밀린 오다는 결국 자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일본에 ‘적은 혼 노지에 있다’란 말이 있는데 이는 적은 내부에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도요토미가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르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오다의 부관으로 출신 성분이 매우 천한 사람이였다. 그는 오다가 죽자 그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배신자 아케치 미쓰히데를 죽이고 남아있던 다이묘들을 차례차례 격파하여 오다가 누리던 권력을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도요토미는 오다 군부 내 최대 경쟁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굴복시키고 1590년 오다 노부나가가 꿈에 그리던 일본 전국통일을 이루게 된다.

 

절대 권력을 손에 쥔 도요토미는 전국에 있는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펴는데 전국의 토지와 수확량을 파악하여 이를 바탕으로 다이묘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였으며, 일반 백성들에게 토지소유권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세금을 내게 하였다. 또한 전국에 도수령(刀狩)을 내려 농민들로부터 모든 무기를 몰수하고 히토바라이라 하여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확립함으로써, 농민은 농사에 전념하고 권력은 지배층인 무사계급이 독점을 하여 권력의 기반을 확고히 하게 된다.

 

도요토미는 백년이 넘는 전란을 마무리 짓고 일본정세가 안정을 되찾자 1592년 전격적으로 조선을 침략하게 되는데  바로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도요토미는 일본 통일에 공을 세운 다이묘에게 보상으로 땅을 나눠줘야 했는데, 일본 내 땅으로만은 그 수를 충당할 수 없어 엉뚱히도 조선의 침략을 결정하게 된다. 

 

전쟁 초반 연이은 승전보로 도요토미는 조선을 넘어 중국까지 진출을 노렸으나, 명나라의 적극적인 전쟁 참전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물거품으로 끝난다. 1598년, 도요토미가 후시미(伏見城)에서 지병으로 사망함으로 전쟁은 막을 내린다.

 

 

도요토미 사후, 권력은 자연스레 당시 도요토미의 최대정적인 도쿠가와에게 돌아가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센고쿠 시대 최후의 승리자로 볼 수 있는 자이다. 도요토미에게는 56세에 낳은 히데요리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도요토미는 병석에 누워 도쿠가와를 포함한 다섯 명의 다이로(大老)를 호출하여 자신의 후사인 히데요리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그들로부터 각서를 받는다.

 

도쿠가와는 이를 지킬 마음이 1도 없었지만 그의 야욕을 바로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도요토미 사후, 문신들과 무신들이 히데요리를 두고 대립이 격화되자 도쿠가와는 중립을 지키는 한편 히데요리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킴으로써 신뢰를 얻었다.

 

도요토미파의 리더인 이시다 미쓰나리는 반대파를 축출하기 위해 도쿠가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도쿠가와는 오히려 그를 지방으로 내쫒아냈는데, 도쿠가와의 본심을 파악한 이시다는 다이묘들을 선동하여 도쿠가와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이는 일본 역사에서 가장 큰 전투이자 일본을 두고 치른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전국의 다이묘들이 동군(東軍)과 서군(西軍)으로 갈려 치른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가 이끌어던 동군의 승리로 끝나며 일본 천하는 도쿠가와의 차지가 된다.

 

이후 1603년, 현재의 도쿄인 에도(江戸)에 정부를 수립하고 265년의 에도시대를 연다. 오다 노부나가가 뜸들이고 도요토미가 떠다준 밥상을 도쿠가와가 떠먹게 된 것이다. 절대 권력을 차지한 도쿠가와는 다이묘들을 철저히 구분하여 대우하는 한편 지방 다이묘들끼리 혼인을 통해 결탁하는 일을 방지하고자 그의 허락 없이는 다이묘들끼리 혼인을 엄금하는 부케쇼핫토(武家諸法度)를 1615년 실시하고 지방 다이묘를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그들의 가족들을 수도에 볼모로 잡고, 본인 또한 수도 에도에서 1년 간 강제로 거주하는 산킨고타이를 실시하였다.

에도시대는 일본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인 겐로쿠 시대(元祿時代)를 거쳐 메이지 정부군에게 에도 성이 함락되어 멸망할 때까지 265년간 지속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쿠가와는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쇄국정책을 펼쳤었는데, 이러한 정책이 세계열강들의 성장과 달라지는 세계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고 개혁과 개방을 통해 신문물을 받아들인 메이지 정부군에게 멸망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