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이야기

당신이 몰랐던 현대그룹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비하인드 스토리

역사와 여행 2021. 7. 1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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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의 거인 정주영 전 명예회장 만큼 많은 일화를 뿌리고 다닌 인물도 드문데, 소학교 졸업의 학력에 맨손으로 출발해 우리나라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현대그룹을 이끌었기에 그의 주변에는 많은 에피소드가 항상 따라 다녔습니다.

소설 「흙」을 읽으며 변호사를 꿈꿨던 청년 정주영이 16세 때 고향 통천을 떠나는 계기가 됐던 것은 당시 모 신문에서 연재한 이광수의 소설 「흙」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정주영은 이 소설을 읽기 위해 당시 해당신문을 구독하고 있던 마을 이장 집으로 밤마다 2㎞ 이상을 달렸다고 합니다. 소년 정주영은 이 소설을 읽으며 도시생활을 꿈꿨고 주인공처럼 변호사가 되기 위해 가출했는데 실제로 상경한 후 정주영은 `법제통신(法制通信)' 등 여러 법학 관련서적을 독학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가출 후 인천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던 때 청년 정주영이 머물던 노동자 합숙소에는 `빈대'가 들끓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는 빈대에 물리지 않기 위해 탁자위에서 잠을 청했는데 잠시는 괜찮았지만 결국 빈대가 탁자 다리로 기어 올라와 물어뜯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주영은 꾀를 내어 각 탁자다리에 물 담은 바가지 넷을 담가놓고 잠을 잔 것이었습니다. 빈대가 탁자 다리를 타고 올라가다 바가지 물에 떨어져 익사하게 하자는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빈대들이었습니다.


빈대들은 탁자대신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간 다음 사람을 목표로 뚝 떨어져 그들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정회장은 하찮은 빈대도 물이 담긴 바가지라는 장애를 뛰어넘으려 그토록 전심전력으로 노력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최선을 다하면 무엇을 못하겠느냐는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 유엔군 묘지에 보리물결
1952년 12월, 미국 아이젠하워가 부산에 있는 유엔군 묘지를 방문하려하자 미군측은 당시 엄동설한에 정주영 회장에게 묘지를 파란잔디로 단장해달라는 황당한 주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 회장 당황하지 않고 되려 "풀만 파랗게 나 있으면 되는 것이냐“ 고 반문한 뒤 보리밭에서 새파랗게 자라는 보리를 수십 트럭 옮겨 심어 묘지를 녹색바다로 만든 것 이었습니다. 미군들은 이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이후 미 8군 공사는 전부 정주영의 것이었습니다.

◇ 500원 짜리 지폐와 현대중공업 신화
현대중공업 신화 현대조선소를 설립할 당시 정주영 회장에게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는데 정 회장은 1971년 9월 영국 버클레이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얻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가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습니다. 조선소 설립경험도 없고, 선주도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영국은행의 대답은 당연히 `NO'이었습니다. 그러나 정회장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는데 갑자기 바지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펴 보이면서 "이 돈을 보시오. 이것이 거북선이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전인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단지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그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소“ 라는 임기응변으로 롱바톰 회장을 감동시켜 차관에 대한 합의를 얻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선주를 찾는 일 또한 문제였는데 그때 정주영의 손에는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집 몇 채가 선 초라한 백사장을 찍은 사진이 전부였습니다. 정회장은 이 같은 광경이 담긴 미포만 사진 한 장을 쥐고 미친 듯이 배를 팔러 다녔고 결국 정주영은 그리스 해운업계 거물 리바노스를 만나 26만t짜리 배 두 척을 주문받았고 조선소 건립과 동시에 2척의 배를 진수시킨 세계 조선사에 유일한 기록을 남깁니다. 이렇게 설립된 현대조선소는 현대중공업을 현재 세계 최대 중공업회사 중 하나로 성장시키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당시 500원 지폐


◇ 주베일 산업항 대양수송작전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건설 당시, 정 회장은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모든 기자재를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해 세계 최대의 태풍권인 필리핀 해양을 지나 동남아 해상, 인도양을 거쳐 걸프만까지 대형 바지선을 끌고 가는 대양 수송 작전이라는 아무도 생각지 못할 모험을 시도했는데, 수송도중 대형 파이프 자킷이 태풍으로 해난사고가 날 것에 대비해 자킷이 해면에 떠있도록 하는 공법을 강구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선진국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자킷 설치공사 착수와 함께 자킷을 연결하는 빔 제작도 설계대로 울산에서 제작한 것이었는데 수심 30m나 되는 곳에서 파도에 흔들거리면서도 중량 500t짜리 자킷을 한계 오차 5㎝ 이내로 정확히 20m 간격으로 심해에 설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정 회장의 창조적인 발상과 그칠 줄 모르는 도전의식은 가로 18m 세로 20m 높이 36m로 무게가 500t이나 되는 자킷 89개를 울산에서 운반해와 5㎝이내의 오차로 완벽하게 설치하는 것을 가능케 했습니다. 이렇게 만든 주베일 산업항은 20세기 최고의 산업항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주베일 산업항


◇ 서산간척지의 유조선 공법
1980년대 초 정회장은 바다를 메워 농지를 만드는 대규모 간척사업에 돌입했는데 서산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커 20만t 이상의 돌을 구입해 매립해야만 물막이가 가능한 곳이었습니다. 이 때 정회장은 공사비 절감과 공기단축 방안을 강구하다 대형 유조선으로 조수를 막으면 흙과 바윗덩어리 등 현장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도 물막이를 할 수 있다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됐고 정 회장은 "간척지 최종 물막이 공사는 인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공사이며 설사 인력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 엄청난 비용이 문제"라며 "밀물과 썰물 때의 빠른 물살을 막기 위해 폐유조선을 침하시켜 물줄기를 차단 내지 감속시킨 다음 일시에 토사를 대량 투하하면 물막이 공사를 완성할 수 있다"며 당시 간부진들에게 제안하였습니다.


유조선 공법에 대한 실행 가능성을 현대의 기술진이 면밀하게 분석한 후 성공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자 정 회장은 1984년 2월24일, 직접 유조선에 올라 최종 물막이 공사를 진두지휘했고 그래서 이 `유조선 공법'을 `정주영 공법'이라고도 불리면서 이 공법 덕분에 현대건설은 계획공기 45개월을 35개월이나 단축, 10개월 만에 완공시켜 총 공사비를 280억 원이나 절감할 수 있었고 이 사건은 이후 뉴스위크와 뉴욕타임즈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서산간척지 물막이 공사


◇ 소떼몰이 방북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정 회장은 소에 대한 애착이 남달았는데 유년시절 정주영 가에서 소는 생계의 밑천이자 가족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정주영은 어린시절 가난이 싫어 소 판돈을 갖고 무작정 상경했고 그 후 노동판의 막일꾼에서 세계적인 기업가로 성공하기까지 정 회장은 묵묵히 일 잘하고 참을성 있는 소를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 걸어왔다고 합니다.


지난 1998년 6월 정 회장은 민간기업인 최초로 소떼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면서 `이제 그 한 마리가 천 마리의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며 "이번 방북이 한 개인의 고향방문을 넘어 남북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고 이후 정 회장의 간절한 바람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만남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정주영회장 방북